추사(秋史) 고택(古宅)
충남 예산의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생가(生家)
직원들과 충남 예산 일정을 마치고, 이 지역에서 유명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고택(古宅)>을 방문했다. 보통 고택(古宅) 하면 한옥마을의 기와집이나 관광객이 숙박체험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 몇 칸의 방과 마당을 떠올렸는데, 막상 와보니 넓은 부지에 잘 정돈된 가옥과 전시관이 눈에 들어왔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추사고택과 안내소
문화유적 방문할 땐 언제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편이다. 이 습관은 오래전에 <경주 석굴암>을 견학했을 때부터 생겼는데, 그냥 친구들과 웃는 사진 찍으며 둘러본 석굴암과 전문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살펴보는 석굴암은 전혀 다른 감동을 내게 주었다. 모든 게 그렇듯이,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만, 문화재 역시 그런 것 같다.
▲ 추사 고택 관광안내소 정면
▲ 추사고택 문화관광해설사 고가와데루요 씨
다행하게도 추사 고택은 충남예산군의 문화관광해설 대상이었다. 특이점은 이곳 추사 고택을 해설해주는 분이 고가와데루요 라는 여자 분인데, 십 수년전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문화재를 일본 출신 해설사에게 듣는 시간이 되었다 ^^.
▲ 추사 고택 입구
<추사 고택>도 역시 다른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양반집 주택처럼 뒤쪽으로 낮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앞쪽은 비교적 지대가 낮은 전답이 있기에, 계단을 이용해 집안으로 들어가는 형태를 띠고 있었고, 대문은 가마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좌우 행랑보다 높은 <솟을대문> 형태였다. 충남 청양의 <방기옥(方基鈺) 가옥(家屋)>도 집안으로 들어갈 때 계단과 <솟을대문> 형태로 설계되어 있었다.
▲ 추사사고택 사랑채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3칸짜리 방을 ‘ㄱ’자 모양으로 갖춘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는 이 집의 남자 주인이 외부손님을 맞아 문화적 유희를 나누는 장소인데, 추사고택의 경우 사랑채의 규모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아서, 맑은 날 가까운 벗들과 담소나누기에 아주 적당한 크기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청 쪽 문은 모두 위로 활짝 들어 올릴 수 있는 <들어열개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맞바람이 칠 수 있게 습도가 높은 우리나라 기후에 딱 맞는 조상님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 추사고택의 안채
추사고택은 본래 김정희의 증조부이신 월성위 김한신이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어 하사받은 53칸의 집이고, 추사가 태어나고 자라고 죽은 뒤에 묻힌 장소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이곳 안채에서 김정희 선생이 뛰놀고 공부했을 것이다.
사랑채와 달리 이 곳 안채는 가족들과 의식주가 행해진 장소라서,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ㅁ’자 형태로 되어 있었다.
▲ 추사고택과 전시관 사이에 있는 김정희 묘
김정희 선생은 비록 당대 최고의 실학자이자 서예가로 이름을 떨쳤지만, 당시 세도정치 집안이었던 안동 김씨와의 다툼(1840년 능지처참 당한 중죄인 윤상도의 탄핵 상소문 초안을 쓰는데 김정희선생이 간여)에서 밀리면서 약 8년간 제주유배를 가야했다. 제주유배를 떠날 당시 그의 나이가 55세였는데, 그 당시 남자 평균수명이 40세 안팎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매우 늙은 나이였고 제주에서 죽음을 맞이할 공산이 컸다
지금이야 제주도가 천연비경과 생수(농심 제주 삼다수)로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농·어업 기술이 일천하여 제주지역은 늘 식량이 부족하였고,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토질이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암이 일반적이라 식수도 제대로 없었다. 해서 제주는 한번 유배가면 다시는 못 돌아오는 곳으로 여겨져, 나라의 중죄인이나 정치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정치인과 관료들을 다시는 돌아오지 말고 그곳에서 죽으라고 의미에서 육지에서 멀리감치 떨어진 제주로 유배를 보내곤 했다(실제로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에서 유배살이를 하다가 사망하였고, <송시열>은 내내 유배생활을 하다가 결국 사약을 받았다).
하지만 김정희는 8년의 제주 유배생활을 건강하게 용케도 잘 견디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김정희가 유배지 근처에 있는 <산방산> 등산을 거의 매일 쉬지 않았고 그 등산 덕분에 건강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김정희는 건강을 잘 관리하였고, 자기 개발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아서, 제주 유배생활동안 <추사체(秋史體)>라는 자기만의 필체를 완성하였고,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라는 조선 최고의 그림(이것도 현재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음)을 그렸고, 제주에서 많은 후학들을 교육하여 제주인문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까지 만들어 주었다.
<추사체(秋史體)>를 처음 접했을 땐 정자로 쓴 해서체와 달리 잘 쓴 한자글씨라기 보다는 먹으로 그린 그림과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김정희가 성장할 때 쓴 한자글씨솜씨가 매우 뛰어났고 그 글씨가 발전하여 추사체가 된 거라는 것은 후에 알게 되었다.
사물을 마치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린 사실화 화가였던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추상화를 그린 최고의 추상화가가 된 것과 같은 이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사체>는 보면 볼수록 힘차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 추사 김정희의 걸작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 추사 기념관 전경
이곳 추사고택 옆에는 김정희의 살았던 일생, 그가 남긴 글과 그림을 잘 정리하여 전시한 <추사기념관>이 있다.
요즘이라면 ‘김정희 기념관’이라고 이름 지었을 만도 하지만, 굳이 ‘추사 기념관’이라고 명명한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지금 젊은 세대야 박정희, 김정일, 김정은 이런 이름을 들어도 별다른 느낌을 안 주지만, 군사독재 시절에는 ‘정희’가 남자이름이냐? 여자이름이냐? 라고 묻는 것도 경찰이 잡아간다고 하는 우스갯소리도 있었고, ‘김정 * ’ 하면 대번 북한 김정일, 김정은과 무슨 관계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시절이 있었다. 혹시 그래서 ‘추사 기념관’이 무난한 이름으로 선택된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 추사기념관 관람안내문
친구들과 관광지를 방문하면 방문지의 우선순위가 대체로 갈라진곤 한다. 한 그룹은 해당 지역의 유흥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우선 가자고 하고, 다른 그룹은 어떤 지역을 가든지 그 지역 대표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꼭 찾는다.
이곳 추사 기념관은 김정희 선생의 드높은 서예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세에 남긴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하여 2008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출처 : 충남도청 홈페이지
도민리포터 상록수님의 기사입니다.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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